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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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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로 서사를 읽기 전에
송미경 작가의 그림책 스토리텔링 1
나는 그림책의 내용보다 제본, 판형, 앞표지, 뒤표지, 책등, 면지 같은 것에 좀더 관심을 두는 편이다. 미술관에 갔을 때도 특정 공간의 어떤 위치에 그림이 배치되고 어떤 동선 안에 놓였으며 액자의 재질은 무엇인지, 조명은 어떤 방식인지 보는 것을 즐긴다. 특히 그림책 감상자가 그림책을 손에 쥐고 어떻게 대하는지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책을 받아 쥔 사람이 책을 앞뒤로 뒤집어 본다든지 책의 모서리, 책등을 다루는 모습 등 그림책의 물성을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관찰한다. 또 그림책을 볼 때 글을 먼저 읽는지 그림을 먼저 보는지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어떠한지 보는 것도 좋아한다. 어떤 이는 그림책의 그림을 먼저 훑어본 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글과 그림을 함께 보고 어떤 이는 그림책의 글을 먼저 읽은 뒤 그림을 관찰하기도 한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느린 사람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림이 하는 말을 보는 사람, 그림의 기법이나 사용된 재료를 관찰하는 사람, 직관적으로 그 모든 것을 느끼는 사람, 그림이 주는 정보를 헤아리는 사람 등이 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방식의 수만큼 그림책을 보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림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가 그림책을 대할 때 가볍게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글이 없는 경우 그림만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그러니 이것을 해독하려 하거나 의미를 발견하기 전에 그림책의 물성이 내 몸에 전하는 진동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우선 책의 크기나 두께, 세로나 가로 등의 판형을 마음으로 느낀다. 그다음은 면지에 사용된 색이나 그림을 감상한다. 잎이 무성한 초록빛 여름 나무, 줄기와 가지가 검게 변한 정갈한 겨울 나무의 형태나 톤만으로 우리가 풍요나 쓸쓸함을 느끼는 것처럼 특정 색이나 형태가 은근하게 전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이미지를 읽기 위해 이론과 법칙에 얽매일 필요는 ‘전혀’ 없다. 좀더 섬세히 느끼기 위해 촉을 세우는 정도면 좋다.

배경과 캐릭터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본 다음 그림의 어떤 요소가 특히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가도 생각해본다. 어떤 그림은 선으로, 어떤 그림은 양감으로, 어떤 그림은 색으로, 어떤 그림은 질감으로, 어떤 그림은 독특한 구도로, 어떤 그림은 여백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둔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언어가 어떤 의미를 전달함과 동시에 음색이나 어조, 미세한 표정이나 침묵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걸 전달하는 것처럼 그림책의 재료나 화가의 필치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림책은 여러 장의 그림이 특정한 순서로 연속해 배열되므로 책장을 한 번 주욱 넘기며 그림의 리듬감도 느껴본다. 똑같은 의미의 언어도 속도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게 전달되듯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따라 다른 자극을 받을 것이다. 그림책의 상영 속도는 우리가 직접 조절할 수 있는 셈이니 자신의 심상에 맞는 속도대로 이야기를 재생해보면 좋다.

그림에 사용된 재료도 살펴본다. 유화와 수채 물감, 색연필이나 잉크 등의 재료를 자세히 몰라도 상관없다. 두텁고 깊은 느낌인지 맑고 투명한 느낌인지 혹은 그림의 선이 매끄러운지 거친지, 한 획에 그어진 그림인지 잔선들로 이어진 그림인지 정도만 느껴도 좋다. 이렇게 마음껏 그림책의 물성과 이미지를 탐색한 뒤에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텍스트 읽기로 넘어가도 늦지 않다.

한 권의 그림책은 하나의 세계다. 우리가 대충 보든 꼼꼼히 보든 어차피 우린 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매력 때문에 문득 다시 낡은 그림책을 꺼내 새로운 눈으로 책장을 넘기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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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경_동화 작가, 『돌 씹어 먹는 아이』 저자 / 2018-01-01 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