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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속 모색과 실험의 성과 ‘일본 그림책 100년의 발자취’
일본의 그림책 문화 엿보기 1
최근 일본에서는 현대 그림책 탄생 100년을 맞이해 일본 그림책의 역사를 회고하는 전시들이 곳곳에서 개최되었고 국내외 출판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것은 일본이 풍요로운 그림책 시장을 일궈낼 수 있었던 배경과 함께 일본 그림책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지난 11월 국립국회도서관 국제어린이도서관에서 열린 ‘일본 그림책의 발자취전’은 130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 그림책의 흐름을 시대별로 조망했다. 1300년 전 두루마리 그림에서 시작된 그림으로 보는 이야기는 그 형태와 구조가 조금씩 변화했다. 상업 출판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17세기에 들어서야 현대 그림책과 근접한 모습의 아동 출판물이 등장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사회 전반에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컬러 그림책과 교육 목적의 그림 잡지들이 출간되다가, 20세기 초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예술성 높은 그림 잡지들이 속속 창간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그림책과 그림 잡지들은 그림의 예술성을 제고하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의미하는 동화(童畫)라는 장르를 확립시키며 현대 그림책의 탄생을 알린다.


<이와무라카즈오 『14마리의 달맞이』(동심사)>
현재 도쿄 치히로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 그림책 100년의 발자취전’에서는 격동의 시대였던 지난 100년 동안 현대 그림책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출판계와 작가들의 치열한 모색 과정과 성과들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화가들의 활동 무대이자 그림책이 발전하는 마중물이 된 그림 잡지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 전쟁에 돌입하면서 강제 통폐합되거나 군국주의 세계관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림책 역시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값싼 재생지를 쓴 조악한 인쇄물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출간이 멈추고 만다.


<竹取物語(다케토리 이야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설화)>
패전 직후 혼란스러운 사회 정세와 미군의 출판 검열로 움츠러져 있던 일본의 그림책은 자유와 평화의 기운이 점차 확산되면서 억눌려 있던 창작 욕구가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분출한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는 지금도 발행되는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어린이책 시리즈와 후쿠인칸쇼텐(福音館書店)의 월간 창작 그림책 『어린이의 친구(こどものとも)』가 등장해 현대 일본 그림책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와나미쇼텐이 서구의 명작 그림책을 번역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림책의 매력을 보여줬다면, 후쿠인칸쇼텐은 서사성이 풍부한 스토리에 세련된 감각을 입힌 일본 그림책을 탄생시켰다. 특히 후쿠인칸쇼텐의 편집자였던 마츠이 다다시는 뛰어난 안목으로 화가, 만화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인재들을 발굴해 현대 일본 그림책을 대표하는 작가들로 키워냈다.

고도 경제성장에 돌입한 1970년대에는 여러 출판사들이 그림책 시장에 진출하고 연간 천 권 이상의 그림책이 쏟아져 나오는 등 전례 없는 그림책 붐이 일어난다. 특히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하는 그림책작가가 등장하고 글 없는 그림책이나 어린이에 한정하지 않는 그림책이 나오는 등 그 형식과 소재가 다양해지는데 이때 출간된 그림책들 중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롱 셀러가 많다. 또한 1977년 도쿄에서는 세계 최초의 그림책 미술관인 치히로미술관이 개관해 그림책 역사에 새 지평을 연다. 치히로미술관을 비롯해 이후 전국 곳곳에 문을 연 그림책 미술관들은 그림책 원화를 보전하고 전시해 원화를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이후 긴 불황기를 지나며 주춤했던 일본 그림책은 현대 그림책을 보고 자란 2세대를 중심으로 1970~80년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 방식과 경향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동시다발적인 테러와 전쟁을 목도하고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재해를 겪으면서 그림책으로부터 위안을 얻은 어른 독자들이 그림책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현재 일본 그림책은 롱 셀러의 여전한 독주 속에 신간 점유율이 점차 확대되는 등 현대 그림책을 일궈낸 1세대에서 현대 그림책을 보고 자란 2세대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그림책은 전 세대가 즐기는 세대 공감형 매체이자 독립된 예술 장르로 자리매김하며 매년 1400권 이상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풍요로운 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림책을 만드는 이들이 다양한 역사적 변곡점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민감하게 수용하며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를 품고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 결과다.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과 전자책의 확산 등 그림책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는 지금, 일본 그림책의 차세대 주자들은 그림책 생태계의 다양성을 키우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모색과 실험을 거듭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강소영_한일그림책교류회 작가 / 2018-01-01 10:49